<SHE DID IT >
특별한 필요가 있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디자인
KAIST 산업디자인학과 홍화정 교수
특별한 필요가 있는 사람들도 약점을 넘어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 작용을 통해 ‘특별한 디자인’을 연구하다.
“2017년 11월, 미국 뉴욕에 도착한 김현정씨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손수건을 펼치자 바로 A3용지 크기의 단말기가 된다. 김씨는 공항에서 받은 시내 지도를 ‘손수건 단말기’에 다운로드한다. 김씨는 단말기에 뜬 입체지도를 보며 목적지를 찾아간다.”
이 아이디어는 2007년 4월, 카이스트 산업디자인과 홍화정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카이스트 교내 아이디어 경진대회에 출품, 수상한 아이디어다. 최초의 스마트폰인 iPhone이 아직 발표되지도 않았을 시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과감하고 신선한 아이디어였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미래 생활의 변화를 상상하고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것이 즐거웠던 그녀는, 미국 애틀랜타의 조지아텍(Georgia Tech)에서 ‘Human-Centered Computing’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은 모교인 카이스트의 강단에서 학생들과 함께 인간 중심의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장애, 취약계층, 소수 집단을 비롯한 특별한 필요(special needs)가 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홍화정 교수의 연구가 걸어가는 길이다.
Q. 연구하시는 분야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세상에는 수많은 기술 사용자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술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장벽이 있거나, 장애가 있거나, 어떤 질환을 경험하고 있는 등 다양한 기술 사용 맥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탐색하여 여기에 맞는 AI 기술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이 저희의 연구입니다.
이제까지 AI 기술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경험에 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사용자를 고려한 세심한 경험을 제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 연구실에서는 학습 과정부터 소수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 부터 안전하고 주체적으로 AI 기술을 일상 생활에 이용하는 것 까지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AI 기술의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
개개인 고유의 특성과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디자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중고등학교 때는 어떤 학생이셨어요?
중학생 때는 과학 쪽의 천재나 어마어마한 우등생 이라기보다는 음악, 미술, 건축 등 다양한 분야를 좋아하는 학생이었어요.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가우디가 만든 작품들을 보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에 매료되서 막연히 ‘저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때마침 우연히 읽은 <과학동아>에서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에 대한 소개를 접했는데 사람들의 신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행동과 사고 패턴을 고려한 제품 디자인 과정을 보면서 왠지 이 전공이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 그때부터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카이스트에 가려면 과학고등학교를 가는데 좋다고 해서 과학고를 준비했는데 합격을 하여 운이 좋게도 그 때의 관심사를 지금도 탐구 하고 있네요.
Q.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해서 3학년 때 핀란드 헬싱키 공대로 교환학생을 다녀오게 됐어요. 지구 반대편의 세상을 만났죠. 오후 2시기 지나면 컴컴한 밤이 된다던지, 반대로 백야가 되어 환한 밤이 계속되는 등 전혀 새로운 세상이었죠.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견문을 넓히면서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이후에 SK텔레콤에서 7개월의 인턴으로 일하면서 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배웠습니다. 그 때 회사에서 석, 박사 학위를 가지신 선배님들께서 자신의 전문 분야를 가지고 일하시고, 회의를 할 때도 전문성으로 설득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만의 특별한 분야를 발굴하고 키워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Q. 특별히 ‘사용자 경험 디자인(UXD)’에 대한 흥미와 열정이 생기게 된 이유는요?
앞서 저 ‘손수건 단말기’를 구상하고 디자인하면서, 미래기술, 미래인간 및 미래환경에 대한 상상을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지금도, 이전에 없던 사용자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계속 연구를 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 Human-Centered Computing이란 분야가 아직 생소한데 조금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은 조지아텍의 Human-Centered Computing (HCC) 프로그램은 인간의 활동을 더 잘 지원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설계하는 학문을 다루고 있어요. 크게는 기술과 사람과의 소통 경험을 연구하는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소셜 미디어, 협업 도구 등 사회적 맥락에서 기술을 설계하는 소셜 컴퓨팅, 인간의 인지과정, 학습, 창의성 발현 촉진을 연구하는 인지, 학습 과학의 세 분야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전까지 많은 HCI 프로그램이 컴퓨터공학과의 세부 전공쯤으로 들어와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지아텍에서도 진정한 융합학문의 본질을 살리기 위해 컴퓨터 공학, 디자인, 디지털 미디어, 심리학과에서 모두 참여하여 HCC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다양한 학생을 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Q. 연구자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교수님께서 롤모델로 삼으신 여성 연구자가 있으셨나요?
각자의 자리에서 연구를 해내시고 있는 모든 선배 동료 연구자들이 제겐 롤모델입니다. 학부 졸업 직전에 기계과에서 열었던 <기계와 인간>이라는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 때 기계과에 젊은 여성 교수님들이 부임하여 엄청나게 활약하고 계셨습니다. 수업에서 몇 번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참 그 교수님들이 멋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지금 그분들 중 한 분이신 세포역학 전문가 신현정 교수님과 함께 테니스를 3년째 같이 치고 있습니다. 신 교수님은 제게 ‘지속 가능한 연구자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신 분입니다.
Q. ‘지속가능한 연구자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개인에 따라 여러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것을 ‘건강하게 일하기’라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연구를 잘하려면 ‘희생’, ‘무리’, ‘포기’ 등의 키워드가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 그리고 연구자의 삶과 개인의 삶을 필요할 때는 과감히 분리할 수 있는 것 등이 오히려 좋은 연구를 위해 장기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연구는 책상에 오래 붙어 앉아 있을 수 있는 ‘엉덩이 힘’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려면 무엇보다 건강해야겠죠. 연구나 일정이 바쁠 때도 가능한 정해진 테니스 시간을 꼭 지키려고 해요.
Q. ‘연구는 엉덩이 힘으로 한다’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저는 여중을 다녔는데 체육선생님께서 전교생에게 등교하면 무조건 운동장 5바퀴를 뛰고 나서 교실에 들어가게끔 하셨어요. 아침마다 운동장 5바퀴를 뛰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잖아요. 그때는 너무너무 힘들다는 생각 밖에 안 했는데,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부터 점점 그때 매일 아침 운동장을 돌며 키운 체력이 나를 지탱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여학생들은 운동량이 많지 않거나 체력을 키우는 것에 관심이 많지 않은 경향이 있었는데, 그때 강제로(?) 키운 체력 덕을 많이 봐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웃음)
"중학교 때 아침마다 운동장 5바퀴를 뛰며 키운 체력으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습니다. 여학생들은 운동량이 적거나
체력을 키우는데 관심이 크지 않은데 꼭 운동을 통해 체력을 키우길 바랍니다"
Q. 끝없는 연구의 길을 걷는 과학자로서,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스스로의 강점은 무엇일까요?
연구 업적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중간에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도 많았습니다. 좌절을 겪으면서 이게 내 길이 맞나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보면 흥미도 없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럴 때 자책하거나 뭘 억지로 하기보다는 그 상태의 나를 좀 돌아보고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확한 자기 인식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게 저도 얼마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서는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는 것도 멘탈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연구 많은 부분이 공동연구입니다. 그만큼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업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연구자에게서 새로운 지식과 시각을 배우는 것 자체가 연구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는 좋은 계기가 되고요, 공동 연구는 서로의 몫을 다 해야 굴러갈 수 있어요. 책임감이 생기기 때문에 좀 더 엄격하고 루틴하게 저를 관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Q. 연구가 잘 안 풀릴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취미나 리프레시의 방법이 있으신지요?
제 연구의 장점이자 단점은 컴퓨터만 있다면 어디서든 연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 풀릴 땐 장소를 바꿔 보기도 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취미는 테니스입니다. 잘 치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치려고 하고 있고요. 크래프트 맥주도 좋아해서 여행 가면 그 도시의 브루어리를 꼭 찾아서 방문하기도 합니다.
Q.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 랩을 운영하시는 여성 리더로서 일해 오시면서 느끼신 점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앞으로 기억될 여성 리더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인 수가 부족하여 그 비율을 맞추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효과가 이제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제는 단순히 숫자 맞추기가 아닌, 여성 리더만이 갖추고 있는 장점을 조직이 성장하는 데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학생들하고 랩미팅을 하다가 최근 화제가 되는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리더십에 대한 에피소드였는데요, 리더는 조직이 지향하는 방향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일을 하는 과정속에서도 이를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열린 마음으로 피드백을 청취하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선 과감히 개선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순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산업디자인 분야에 관심있는 학생들이라면 어떤 역량과 자질을 키워야 할지 궁금합니다
미래 기술이 가져올 새로운 경험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즐겨보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완전히 긍정적인 미래를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시에 기술 사용의 윤리와 우리에게 미칠, 나아가서는 미래 세대에게 미칠 사회적 영향을 끊임없이 고려해야 합니다. 미래의 AI 서비스 디자인, 데이터 사이언스, 로보틱스를 포함하는 융합 기술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산업디자인학과를 과감히 고려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가우디의 건축물 디자인을 보며 자유로움에 매료되었던 중학생. 혁신적이고 재기발랄한 사용자 경험 아이디어로 아이디어 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은 대학생은 특별한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기술을 통해 단순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고유함과 자신만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2023년, 홍화정 교수는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이들이 직장에서의 적응을 돕는 VR 프로그램 등을 개발했다. 세상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그의 특별한 연구를 응원한다.